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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영압. 내내 지루해서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던 이치마루는 반짝 눈을 뜨며 고개를 돌렸다. 언젠가 정령정을 함께 거닐던 이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늘이 열리고 쏟아져 나오는 메노스 그랑데 속에서, 그들은 그들을 자리에 머물지 못하게 만들었던 호로 가면을 썼다. 한 때 사신이었고, 동료였으며 제 상사이기도 했던 이들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만나지 못...
시작 자세는 잘 잡혀있군. 역시 3석이라는 건가. 아이젠은 유리마의 자세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가 마주한 이치마루는 제 곁에 둘 만큼 실력이 훌륭한 아이였다. 만약 그에게 대적할 수 있다면, 아니, 제가 알고 있는 이라면 할 수 있을 것이다. 5번대 뒷마당은 긴 침묵이 흘렀다. 약간 습하고 더운 바람이 불자 잔디가 와르르 일어나 울어...
간만에 돌아온 소울 소사이어티의 날씨는 흐렸다. 구름이 조금씩 비를 흩뿌리고, 처마에서 토닥토닥 하는 소리가 크게 들릴 때 즈음, 과거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른다. 미나모토는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본다. 조그마하던 웅덩이가 점점 크기를 키워간다. 그 모습이 이유를 알 수 없게 서럽다. 모여드는 것들이 점점 커지는 게 왜 서글프게 느껴지는지. 기...
조직이 들썩일 거야. 상석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앉은 남자가 불만스럽게 말했다. 귀한 손님이여야 앉을 수 있는 빈 의자 옆에 서 있는 아이젠을 대놓고 노려보면서 혀를 찼다. 저것들은 오래 못 갈 거다. 이런 자리에서도 앞인지 뒤인지 분간을 못하니까. 히라코는 뿅뿅 소리를 내며 게임을 하던 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속으로 생각했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노인네들....
날씨 한 번 좋구만. 팔을 앞뒤로 붕붕 흔들어가며 걷던 쿄라쿠가 갑자기 꼬리를 늘리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우키타케는 잠시 놀랐다가 이내 큭큭 웃었다. 그런 아저씨 같은 말투는 또 어디서 배운 거야? 배우기는 누구한테 배워, 영감님 아니겠어. 그렇게 말하면 못 써, 쿄라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는 두 남자의 걸음이 정처없이 진앙영술원을 떠...
노인 공경의 자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사내라는 건 알았지만. 쿄라쿠는 잇새로 신음을 뱉었다.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어깨를 꽉 눌러잡는 바람에 생긴 우라하라의 손자국 위로 제 손을 얹었다.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따끔거리고 아파왔다. 곱슬하게 풀린 머리카락이 제 손등을 스치고 아래로 떨어졌다. 빈틈없이 빼곡하게 잇자국이 남아 있었다. 무슨 개도 아니...
난감하네. 호열은 비에 젖어 미끌거리는 볼을 긁적였다.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들은 적도, 배운 적도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 앉아서 아무런 위로의 말없이 손가락만 빨아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는 것 또한 잘 안다. 일단 따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커피로 입술을 살짝 적신 다음,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저기, 예원아.” “....왜.”...
저기 있구만. 이치마루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풀밭에 누운 유리마에게 다가갔다. 아이는 이 공간을 좋아했다. 기분이 좋을 때, 기분이 나쁠 때, 아무렇지도 않을 때, 아프고 힘들 때, 서러울 때,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행복한 일이 있을 때 등등. 울창하게 자란 나무 아래 좁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너른 풀밭이 나왔다. 앞이 탁 트인 곳. 건물 한 채 없는,...
이런. 아이젠은 지나가는 유리마의 앞을 막았다. 스쳐 지나가며 얼핏 본 얼굴이 퍽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다른 사신이었다면 앞으로 달려 나가는 대신 뒤에 서서 친절한 목소리로 그를 부른 다음, 고민을 들어주는 척했을 것이다. 다정한 5번대 대장이란 그래야 하는 거니까. 하지만 상대는 코이 유리마였다. 제가 만든 루콘가의 지옥에서 살아남은 아이. 지옥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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