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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정뱅이 사내가 가져온 과일주 덕분에 연회는 밤이 늦도록 이어졌다. 연회는 무르익어가고 춤추는 이들은 발이 엉킨다. 하프를 닮은 현악기를 어루만지며 노래를 부르는 일란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흥을 돋우었다. 일라나이 여럿이 모여 서로 입을 맞추었다 껴안았다 가슴을 떠밀었다 하며 즐거이 희롱하는 모습은 더없이 천진하면서도 야릇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그는 혀가 ...
노인은 나무등걸에 앉아 마른 고기조각을 작게 잘라 입에 넣고 어금니 틈에서 가만히 불린다. 그들은 살과 잎의 균형을 위해 남의 살을 먹었지만 그것을 재미로 삼지는 않았다. 단단히 말라붙은 동물의 생기가 침에 녹아 입 안에 달게 맴돌았다. 노인은 의식처럼 느리게 씹었다. 한 줌의 곡식과 말린 고기와 나무열매. 소박하지만 든든한 식사였다. 길잡이 막대를 쥐고 ...
대기실 안의 모든 것은 표백한 것처럼 희었다. 그는 새하얀 카우치에 앉아 불편한 기색으로 목깃을 추스른다. 분기마다 한 차례씩 돌아오는 건강검진을 제외하면 그가 의학연구소에 찾아올 일은 드물었다. 일반적인 병원이라면 으레 맡을 수 있는 소독약의 냄새조차 나지 않는 완벽한 무색무취의 공간은 자연과 거리가 먼 캐러밴 안에서도 가장 부자연스러운 곳이었다. 여간해...
아이는 테두리가 깔쭉깔쭉한 연녹색 이파리를 따내 옆구리에 끼고 있는 광주리 안에 넣었다. 오전에 내린 빗방울에 연한 잎을 골라내는 손가락 끝이 촉촉하게 젖었다. 아이는 이파리 하나를 이리저리 들여다보다가 입에 넣고 씹는다. 시큼한 맛에 눈코입이 한데 모인다. 아이는 도리질을 치면서도 입 안에 든 것을 오물오물 씹어 삼키고는 다시 부지런히 잎을 따낸다. 작은...
휴가는 끝났다. 그는 소중한 편지를 가슴에 품고 밀린 일거리가 기다리는 캐러밴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숨을 쉰다. 그나마 이번에 작업중인 문헌은 상태가 꽤 좋았다. 그것은 적어도 산산히 부서진 양피지 조각을 핀셋으로 이어가며 풀칠을 할 필요나, 읽는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보안 문장을 해제하기 위해―이런 함정에 당해 직장을 그만두는 연구원이 사오 년에...
율마 래버틴, 디트리히 슈뢰더, 한스 슈티르너……. 남자에게는 여러 이름이 있었다. 어느 것도 본명은 아니었다. 남자가 가진 이름 중에서 가장 유명한 이름은 ‘로키’. 고대지구의 북구 신화에서 유래한 장난스러운 이명은 이데아의 정보시장을 이용하는 협잡꾼들 사이에서는 마치 신처럼 불리는 이름이었다. ‘로키’는 산업 스파이, 블랙햇 해커, 정보상, 사기꾼이었다...
조용한 연구실 안에 작은 착신음이 울렸다. 그는 뜨거운 커피잔을 입가로 가져가다 말고 데스크 위에 놓아둔 패드를 들여다본다. “안녕하세요. 어머니……아뇨, ‘엄마’ 는 아직 좀 안 익숙해서. 으……좀 봐주세요. 예. 잘 지내셨어요? 아, 예. 저야, 아뇨……뭐, 비교적 잘 지내는 편입니다. 월급 쓸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쁘긴 하지만 말입니다. 예. 예. 못...
그는 안경을 벗어들고 손바닥으로 얼굴을 벅벅 문지른다. 짓눌린 신음이 절로 새어나온다. 몸을 젖혀 기대니 의자와 허리에서 동시에 삐걱 소리가 난다.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던 문장들처럼 낡고 흐릿해진 눈을 비비는데, 가느다란 손가락이 그의 손과 얼굴 사이로 미끄러져들어온다. “베레티?” “피곤해요?” “조금 졸리네요.” 그는 나른한 한숨을 내쉬며 의자 팔걸이...
그가 자신의 맹목을 인지하는 과정은 실로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함께 해온 얼마 되지 않는 시간 동안 그가 알아낸 바에 따르면, 그녀는 정말……완벽했다. 어린 숲에 내리는 햇살처럼 화사한 미소. 강조하고자 하는 단어마다 독특한 악센트를 넣어 발음하는 조근조근한 목소리. 손가락의 부드러운 움직임. 농익은 과즙처럼 선명한 색의 입술. 천진하게 웃음을 터뜨리는 그...
“으으…….” “긴장 풀어요…….” 그는 고개를 숙이고 나지막한 신음을 토한다. 그녀는 그의 등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달래듯이 속삭인다. 그는 혀를 내어 말라붙은 입술을 축인다. 속이 죄어드는 느낌에 조바심이 났다. “노력중인데 잘 안 되는군요……당신은 긴장되지 않습니까?” “이미 우리 손을 떠난 일인걸요. 만약 ‘문제’가 생기더라도 우리에게 그것을 '고칠...
“잘 먹겠습니다.” 때는 느긋한 점심시간. 캐러밴 본선 연구단지, 문화예술교류연구소 공용 휴게실의 조명은 연합 표준시에 의거한 함내 환경정책에 따라 따스한 정오의 햇살을 모사하고 있었다. 연구원들은 하얀 테이블에 삼삼오오 모여앉아 잡담을 나누며 식사를 한다. 그녀와 그와 그의 선배도 조그만 테이블에 둘러앉아 점심식사를 막 시작한 참이었다. 주변으로부터 흘끔...
“이렇게 ‘화려한’ 곳은 처음인걸요.” 그녀는 벽걸이 장식을 가까이 들여다보며 수첩에 무언가를 꼼꼼히 적었다. 비단실로 하날뫼의 건국신화를 아로새긴 타피스트리는 오랜 옛날 함장이 도시 하나를 살 수 있는 분량의 금을 주고 손에 넣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물건이었다. 그는 자신의 십년치 연봉으로도 여기 달린 장식술 한토막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되새기며 눈을 ...
“그걸 하나하나 대답해주고 있다가는 큰일납니다.” 그는 넌덜머리를 내며 의자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녀의 등장은 연구단지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소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게 된 연구원들은 문화예술교류연구소 내부를 돌며 시설 안내를 받는 그녀에게 몰려들어 앞다투어 말을 걸었다. 연구원들은 궁금한 것이 많았고, 으레 그러하듯이 예의가 없었다. 사방에서 ...
그는 긴장한 얼굴로 연구실장의 사무실 문 앞에 서 있었다. 오늘 오전 캐러밴은 테이라의 위성 정거장 에테르눔에 입항했다. 무역품과 보급 물자를 담은 왕복선이 오르내리는 날이 언제나 그렇듯이 술렁이는 분위기였다. 주문한 기호식품이나 취미용품을 배달받은 연구원들이 환성을 지르고, 가십거리에 목마른 직원들은 휴게실에 삼삼오오 모여 정거장의 소식과 새로운 승선객에...
캐러밴 문화예술교류연구소 언어문화연구부 고문서 해독 · 복원 · 번역 전문가 제레미아 레마르 개인 연구실 거창하기도 하지. 그는 투덜거리며 문을 열었다. 연구실 내부는 아직 정리가 끝나지 않아 어수선한 모습이었다. 기숙사에서 사용하던 개인 물품을 대강 쓸어담은 상자는 반쯤 열린 채 보조 데스크 위에 놓여 있었다. 카페인이 절실했지만 애용하던 머그컵은 아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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