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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오나. 뺨에 떨어지는 물방울을 맞으며 생각했다. 일기 예보에는 그런 말 없었는데. 창문도 안 닫고 나왔는데. 바닥에 닿은 손등은 건조했다. 비가 아니구나. 나는 확신했다. 지금 눈을 뜨면 볼 수 있을 거라고. 길바닥에 엎어져 식어가는 이 순간 떠오르는 한 사람을. ○ 네가 올 줄 알았어. ● 윤지수는 죽었다. 나 떠나서 얼마나 잘 사나 궁금했는데....
덜덜거리는 선풍기 모터 소리에 눈을 떴다. 코드는 제 자리에서 뽑힌 지 오랜데 젖먹던 힘까지 짜내 지랄을 해댔다. 웅크렸던 몸을 뒤척이며 자세를 고쳤다. 무더위 내내 저 고물 하나로 버텼으니 탈이 안날 리가. 낡고 하자가 있는 건 꼭 이렇게 아픈 티를 낸다. 조용히, 묵묵히 사는 법을 모른다. 역시 뭐든 새삥이 좋다. 그래서 난 내가 싫다. * 이 집안의 ...
*유혈 묘사 주의* 찰나의 고통과 함께 발끝에서부터 온몸을 채우는 낯선 느낌이 나쁘지 않을뿐더러 황홀했다. 있을 때마다 욱신거려서 잘라내고 싶었던 왼쪽 발목도 아무렇지 않았다. 은유는 다시 태어나 또 다른 생일을 맞이했다. 이은유는 다시 눈을 뜨게 되면 뭐가 보일지 상상한 적이 있었다. 새하얗고 밝고 천국, 새까맣고 뜨겁고 어두우면 지옥이겠지. 좆같은 인생...
꿈에 네가 나왔어. 가만히 서 있더라고. 오랜만에 봤는데 반갑지도 않은지. 냅다 뛰어가 안았어. 그 순간 꿈인 게 실감이 나더라. 처음부터 끝까지 말도 안 되니까. 다시 자려고 누웠는데 뒤척이다가 잠도 안 오고 해서 편지라도 쓰는 중. 이사했어. 뭘 받으러 올 사람도 없는데 쫓기듯 숨었어. 아직 옆집에 누가 사는지도 몰라. 여긴 별 다를 것 없이 꼬질꼬질한...
- - - 통화연결음이 일정한 간격으로 울렸다. 가볍게 쥐고 있던 핸드폰을 고쳐쥐었다. 최근기록을 둘러보던 중 반가운 이름이 눈에 걸려 실수로 누른 탓이었다. 습관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거구나. 그냥 끊어버릴까 하다가 화면을 귀에 가까이했다. 아무 벽에 기댄 탓인지 얇은 티셔츠를 통해 콘크리트 벽의 냉기가 느껴졌다. 뚜-뚜-뚜- 어떤 친구라고 설명하면 좋...
벽색이 온 세상이 품은 색깔을 덮었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가라앉는 차분한 색이 덮인 지금은 새벽 4시 30분이었다. 애써 초록 페인트로 서투르게나마 덮어보지만, 벽 귀퉁이 어느 한 곳이라도 성한 데가 없었던 아파트 입구에서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붉은 목도리를 두어 번 감은 사람은 아무도 배웅해주지 않는 길을 나섰다. 검은 패딩 모자 위에 대비되는 머리...
Jeremiah 11:11 9월이라니, 거짓말. 거짓말 같은 날이 반복되었다. 인사하고 지내던 주민들이 하루아침에 괴물로 변하거나 각자의 죽음을 맞이했고, 말도 안 되게 새하얀 눈이 내렸고, 반강제적으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나, 하루 세 번 체온을 재고, 불시에 점호를 하고, 보급품을 받는 반복적인 행위는 일상이 되어버렸다. 이전에...
이 모든 좆같은 일을 겪어보니 알겠다. 믿지도 않는 존재의 생일을 축하하는 것은 목숨을 부지하기에도 바쁜 사람에겐 사치라는 것을. 다른건 필요없고 씨발,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라고. 은유는 익숙하지만 아직은 어색한 비린내가 나는 계단을 걸으며 선물 대신 작은 희망사항을 떠올렸다. 지수누나랑 은유, 둘은 2층좀 갔다와주세요. 이은혁이 시킨 일은 혹시라도 남...
상처는 등가교환이 안된다는 것이 씁쓸하다. 그 불공평한 것을 주는 사람은 받는 사람의 입장은 생각도 안한다. 그래서 그걸 상처라고 부르는 거겠지. 내가 뱉은 말도 어쩌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됐겠지만, 사람이라는게 이기적인 동물이라 그런지 가슴에 박힌 모진 말들만 기억에 남는다. 그 사람도 결국 나랑 같은 사람이라서 그랬겠지? 애써 이해해보려 노력하지만 아직도...
하루 일과의 공백이 많아진 나는 책을 다시 집어들었다. 스마트폰에 중독된 사람일수록 충동성이 커지고 자제력이 줄어든다는데 그 말이 맞는것 같다. 어제만 해도 소설책을 두 권이나 주문했다. 독서는 나쁜게 아니니까 후회는 안하지만, 아무튼 요즘들어 내 결단력에 스스로 자주 놀라는 중이다. 누군가를 격렬하게 좋아했던 만큼 책에 내 모든 애정을 쏟아보려고 한다. ...
문영은 가출한 엄마를 찾기 위해 캠코더를 들고 사람들의 얼굴을 찍는다. 요즘 사람들의 시선에선 그것이 '도촬'이 될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지만, 캠코더를 든 아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마냥 비판만 할 수 없을것 같기도 하다. 문영이 녹화한 비디오를 일본에 사는 친척에게 보내면,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 비슷한 얼굴을 찾는 방식으로 엄마를 찾는데, 현실적으...
복잡한 지하철 안, 안생은 소가명과 마주치며 안생의 오랜 친구 칠월이 쓴 인터넷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노트북을 열어 소설의 제목을 치고 한 글자씩 읽어나가며, 영화의 시점은 안생과 칠월의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간다. 말썽피우기를 좋아하는 안생은 칠월과 함께 목욕도 하고, 장난도 치며 발랄한 유년시절을 보낸다. 칠월은 명문고, 안생은...
12세래. 이 영화의 포스터만 보고 호기심에 찬 표정으로 보러갔을 딩초들을 상상하니까 눈물이 앞을 가린다. 정말 희망도 미래도 없는 멘탈 와장창 영화임. 감독은 무슨 생각으로 관람 연령 등급을 12세로 했을까? 만들면서 이런 영화 나 혼자 몰 수 없지 하는 생각으로???아니면 뭐 수익을 위해?? ***평소에 회를 즐겨 드시거나 앞으로도 생선을 섭취할 의향이...
“한계장님이 정리하는 대로 보내달래요.”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자영의 목소리에, 영진은 모든 사건의 실마리가 풀리고 제 주인을 찾아갈 물건들이 남아있는 작은방을 떠올렸다. 모두가 만류함에도 끝까지 풀던, 실타래처럼 얽힌 이야기들이 남아있던 방. 그곳에 있는 것들이 영진을 버티게 해주었다. 벽 하나를 가득 채운, 누군가에겐 소중한 사람이었던 그들의 얼굴들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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